킹제임스 성경 번역 프로젝트의 시작은 1604년, 영국 런던의 햄튼 코트 궁전, 새로 즉위한 국왕 제임스 1세 앞에 청교도들이 청원을 올리는 사건이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 개혁을 바라는 그들의 바람 중에는 특별히 한 가지 요청이 있었습니다.
“폐하, 온 국민이 함께 읽을 수 있는, 정확하고 공통된 성경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 짧은 요청은 이후 7년에 걸친 방대한 번역 프로젝트의 서막이 됩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마침내 1611년 킹제임스 성경(King James Bible, 이하 KJB)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국왕 제임스는 왜 이 번역을 지시했으며, 그 과정은 어땠을까요?
하나의 성경을 원했다
16세기 후반,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 아래 통일을 유지해왔지만, 종교적 긴장은 여전했습니다. 영국 국교회(성공회)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간 노선을 택하고 있었고, 이에 반발하는 청교도 세력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이어받아 제임스 1세로 즉위합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이미 성공적인 개혁을 이끌었던 그는 잉글랜드의 종교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고, 왕권 강화와 국가 통합을 위해 하나의 성경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됩니다.
햄튼 코트 회의와 번역 지시
1604년 1월, 제임스 1세는 햄튼 코트 회의(Hampton Court Conference)를 소집합니다. 이 자리에서 청교도 대표들은 여러 개혁 요구사항과 함께 “기존의 영어 성경은 오류가 많으니 새롭게 번역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대해 국왕 제임스는 전적으로 동의하며 즉시 새 성경 번역 프로젝트를 승인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명시합니다.
- 기존 역본의 오류와 편견을 배제할 것
- 정확하고 권위 있는 원문을 바탕으로 할 것
- 전체 교회가 사용할 수 있도록 공통 번역본으로 만들 것
이 결정은 단순한 번역 사업이 아닌 국가적 프로젝트,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하려는 신학적 사명이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정교한 번역 작업
국왕의 명령에 따라, 47~54명에 이르는 최고의 학자들이 선발되었습니다. 이들은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에 능통한 언어학자이자 신학자들이었습니다. 번역팀은 총 6개 그룹으로 나뉘어 런던, 옥스퍼드, 케임브리지에 분산되어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세심한 번역 절차가 도입되었습니다.
- 각 그룹은 자신에게 할당된 성경 부분을 번역
- 그룹 내에서 여러 차례 검토
- 다른 그룹과의 교차 검토
- 전체 위원회의 최종 통합 검토
이러한 과정은 단순한 ‘직역’이 아니라, 언어의 리듬과 신학적 정확성, 표현의 존엄함까지 고려한 정교한 번역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번역의 기준: 어떤 원문을 사용했는가?
킹제임스 성경은 당시 가장 신뢰받던 본문들을 바탕으로 번역되었습니다.
- 구약: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 (벤 카임의 마소라)
- 신약: 그리스어 공인본문 (Textus Receptus)
이 본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보존되어 내려온 다수의 사본을 근거로 하며, 교리적으로도 일관된 내용을 유지합니다. 반면, 현대의 많은 영어 역본(NIV, ESV 등)은 바티칸 사본이나 시내 사본 등 소수의 이질적인 사본을 기반으로 하여 교리적 일치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이 번역 작업이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최초로 전체 영어권 사람들에게 열렸다는 것
- 신학적 논란 없이, 통일성과 권위를 가진 성경이 탄생했다는 것
- 국왕이 개입했지만, 정치적 목적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것
무엇보다도 이 성경은 4세기 이상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교리의 기준이 되었으며, 복음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결론: 국왕의 명령을 넘은 하나님의 섭리
킹제임스 성경은 국왕 제임스의 이름을 가졌지만, 그 실질적 주체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번역본이 아니라, 모든 언어를 초월하는 ‘말씀의 기준’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살아 있는 성경입니다.